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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진리 시대와 대학 교육의 지향성-송재룡(중앙도서관 관장/사회학과 교수)도서관 칼럼 2021. 5. 3. 17:00
2016년 11월 영국 옥스퍼드사전 편찬위원회(Oxford Dictionaries)는 ‘탈 진리(post-truth)’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그해에 ‘탈 진리’ 단어의 사용이 이전 년도에 비해 2000배나 증가했는데, 그 배경에는 영국의 브렉시트 이슈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과 관련된 정치사회적 상황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았다. 편찬위원회는 ‘탈 진리’의 뜻을 ‘대중 여론이 형성되는 데에 있어 객관적 사실보다는 개인적 신념과 감정이 더 큰 영향력을 갖는 환경과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탈 진리’ 또는 ‘탈 진리 정치학’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이보다 훨씬 앞서는 것으로, 1980, 90년대의 포스트모던 논의로부터 촉발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쟁점과 불가분하게 연관된다. 특히 탈 진리 개념의 전 지구적 확산은 2000년대 이후 IT 및 원격통신기술의 전 지구적 확산과 더불어 형성된 전자적 가상공간(또는 사이버스페이스 공간)의 무한한 확대와 불가분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이 문화 공간에서는 문자적 언어 이외에 기호, 이미지, 상징 등과 같은 비문자적 언어 체계가 복합적으로 증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실재에 대한 비진정성(inauthenticity)’이 더욱 더 증대하기 때문이다. 즉 실재에 대한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와 해석이 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이른바 료타르의 ‘거대 서사의 기각’ 현상이 더욱 더 확장되어 나타난다.
실재의 비진정성이 증대되어지는 문화적 조건에서는 지식(정보)의 모놀로지적(monologous) 정당성의 원칙이 허물어지고 파롤로지적(paralogous) 지식 -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지식 - 의 양식이 무한 증대된다. 어떤 지식도 그 자체의 정당성의 원칙이 무너짐으로써 절대적 지식의 위상을 고수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지식은 상대화된다. 그 어느 지식도 하나의 언어 게임일 뿐이다. 모든 것을 총괄할 수 있는 언어 게임이 있을 수 없듯이, 지식에도 절대적 지식 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지식도 단지 많은 지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가능성이 무참하게 기각되는 ‘탈 진리’ 문화의 조건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이해다.
탈 진리 문화의 조건에서 지식은 수행성(perfomativity)의 유무에 따라 정당화된다. 어떤 지식이 수행성이 높다는 말은, 상업자본주의적 평가 척도인 효율성과 효용성이 높다는 것이며, 반대로 수행성이 낮다는 말은 이것이 낮아 스스로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업 자본주의의 조건을 고려할 때, 효율성과 효용성이 높게 지속되는 한 그 지식은 생산되어 유통되고 소비되어지는 위상을 갖게 되며, 따라서 더욱 더 잘 사고 팔리는 속성을 갖게 된다. 당연히 이런 유형의 지식은 ‘기능적’ 또는 ‘방법지적’ 지식이다. 주지하듯이 지난 20여 년 동안 이 유형의 지식 체계가 대학 교육의 장(場)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해오고 있다.
하지만 대학 교육의 장은 이와 같은 기능적 또는 방법적 지식들뿐만 아니라 ‘문화적 지식’의 차원이 반드시 작동되어야 한다. 문화적 지식은 지식이 수행해야 할 기능 중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몫을 담당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문화적 지식은 도구적 합리성의 논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계질서를 초월하게 하는 성찰적인 삶을 탐구하게 하고, 또한 심연의 욕망이나 상상 또는 꿈에 대한 예술적 발현과 생산에 입각한 미학적 삶을 지향하게 하는 차원의 지식이다. 이 차원은 ‘탈 진리’의 정치학을 정당화해 가고 있는 21세기 정보지식사회의 지식패러다임이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의 자본화 및 상품화의 추세에 밀려 이 문화적 지식의 차원이 주변화 되면 비자본주의적 삶의 공간과 그에 관한 자유로운 대안적 상상과 담론의 가능성은 짓눌리게 될 것이다. 지식 생산체인 대학 교육의 자율성과 자발성이 제한되지 않고, 따라서 자본과 기술 관료주의적 통제의 기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이 문화적 지식의 차원이 더욱 더 강력하게 작동되도록 담보되어야 한다.
하나의 실천 가능성은 분과 학문들이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들 수 있도록 이종 지식들 간의 통합적(융합적) 연구수행 참여의 기회를 더욱 더 자극 조장하고, 그에 적합한 연구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 교육 연구의 場을 초분과적이고 이종성이 두드러지게 하고, 따라서 학문의 성격을 탈위계적이고 잠정적 또는 역치적(liminal) 특성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나 기후변화의 문제가 갖는 복합성은 이의 필요성을 잘 대변한다. 즉, 이 문제들에 대한 인과적 접근과 그것의 사회·정치·경제·문화적 파급효과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연관된 분과학문들 각각의 경계를 넘어 초분과적으로 통합 연구되어야 한다. 예컨대, 오늘의 코로나바이러스 역병은 단지 전통적 의미의 의학 또는 좀 더 확장된 의미의 의생명공학적 접근에만 의존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외에 기상(기후)학, 정신의학, 물리학, 전자통신공학, 인류학, 철학, 종교학, 윤리학, 사회과학 등의 분과학문 영역들이 각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분과적 기조에 따라 통합(융합)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이 전환적 지향의 예는 ‘문화적 지식’ 차원의 확보만이 아니라 미래 대학의 정체와 역할을 가늠하기 위한 중장기적 전략과도 연결된다.
송재룡(중앙도서관 관장/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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